역사/조선

개국의 열망과 피의 갈등, 조선을 세운 사람들

곰곰이생각 2025. 8. 1.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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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의 열망과 피의 갈등, 조선을 세운 사람들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시작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었습니다. 고려 말 혼란스러운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이상 국가를 건설하려는 뜨거운 열망,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비극적인 갈등이 얽혀 만들어진 역동적인 대변혁의 서막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전환점의 중심에는 여러 역사적 인물들이 있었고, 그들의 엮인 이야기와 잘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야사)는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됩니다.


조선 건국의 주요 역사적 인물

 

조선 건국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태조 이성계 (太祖 李成桂): 새로운 왕조의 문을 연 조선의 초대 국왕. 탁월한 무인이자 냉철한 현실주의자로서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며 명성을 얻었고,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 정도전 (鄭道傳): 조선의 건국 이념과 통치 체제를 설계한 핵심 사상가이자 재상.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꿈꾸며 재상 중심의 정치를 지향했습니다.
  • 정몽주 (鄭夢周): 고려 왕조에 대한 불변의 충절을 지킨 인물. 이성계 세력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고려를 지키려다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습니다.
  • 태종 이방원 (太宗 李芳遠):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자 훗날 조선의 3대 국왕. 건국 과정에서 아버지의 강력한 지지자이자 정몽주를 제거하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왕권 강화를 위해 정도전을 제거하는 피의 숙청을 주도했습니다.
  • 최영 (崔瑩): 고려 말 대표적인 명장(名將)이자 충신. 요동 정벌을 주장하며 위화도 회군을 명령했으나 이성계의 반발로 좌절되고, 고려의 운명과 함께 최후를 맞았습니다.
  • 조준 (趙浚): 신진사대부의 한 사람으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고 경제 제도를 설계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 남은 (南誾): 정도전의 핵심 심복이자 무인으로서 조선 건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제거되었습니다.
  • 무학대사 (無學大師): 이성계의 정신적 스승으로 알려진 고승. 한양 천도 과정에서 도읍지 선정에 자문 역할을 했다는 야사가 전해집니다.

건국에 얽힌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와 비하인드 스토리

 

1. 위화도 회군: 거부된 명(命)과 새로운 길 (1388년)

고려 말은 왜구의 침입과 홍건적의 난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하고 국운이 기울어가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실권을 장악한 최영은 명나라가 고려의 영토였던 철령 이북 땅을 요구하자, 요동 정벌을 주장하며 군사 대국 명에 대한 강경책을 펼쳤습니다. 최영은 당시 최고의 맹장이던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의 선봉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4불가론(네 가지 불가한 이유)'을 내세우며 요동 정벌의 어려움을 간했습니다. 여름 장마철에 대군을 동원하기 어렵고, 명나라와 충돌하면 왜구가 국경을 침범할 것이며, 더운 날씨에 역병이 돌고, 농번기에 백성을 동원하는 것은 민심을 잃는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최영은 이성계의 간언을 듣지 않았고,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까지 진군했습니다. 그런데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回軍)을 결단합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등에 업은 이성계의 회군은 고려 조정에 엄청난 충격과 함께 실권 장악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켰습니다.

  • 야사: 최영 장군의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와 이성계의 엇갈린 운명: 최영 장군은 평생 청렴하고 강직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특히 그의 어머니가 남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훈은 그의 삶의 지표가 되었죠. 이성계와 최영은 한때 왜구를 함께 무찌르던 동지였으나, 요동 정벌을 둘러싼 의견 대립과 위화도 회군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인해 엇갈린 운명을 맞이합니다. 최영이 이성계의 회군을 반역으로 규탄하며 맞섰지만, 결국 이성계의 세력에 의해 체포되어 귀양 갔다가 처형됩니다. 이때 백성들은 최영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무덤에 풀이 돋아나지 않는다는 전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출처: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여지승람』 등)

2. 정도전과 이성계: 이상적 설계자와 현실적 리더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는 군사적 실권을 장악했지만, 새로운 왕조를 열기 위한 사상적, 제도적 기반은 정도전의 몫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로, 맹자(孟子)의 역성혁명론(易姓革命論)을 바탕으로 고려 왕조의 명분론을 반박하고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등을 저술하며 조선의 정치, 경제, 국방, 교육 시스템 전반을 설계했습니다. 왕도정치와 재상 중심의 정치를 지향하며, 국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두고 재상이 실질적인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이러한 사상적 기반과 뛰어난 행정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했습니다.

  • 비하인드: 정도전의 꿈, 왕이 될 수 없는 '왕의 나라': 정도전이 꿈꾼 나라는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사로운 욕심에 휘둘리지 않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도덕적인 군주'와 그 군주를 보좌하는 '능력 있는 재상'이 조화된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구현하려 했습니다. 즉, 왕은 하늘의 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존재이지만, 그 권한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으며, 실제 국정은 학식과 덕망을 갖춘 재상들이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훗날 이방원과 정도전의 갈등이 격화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됩니다. 이방원은 왕권의 절대성을 주장했기 때문이죠. (출처: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3. 정몽주의 최후와 단심가, 하여가 (1392년)

이성계와 정도전이 조선 건국을 위한 준비를 가속화하는 동안, 정몽주는 고려 왕조에 대한 마지막 충절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진사대부 중에서도 유일하게 역성혁명을 반대하며 고려의 운명을 지키려 했습니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여 그를 회유하려 했고, 그 임무를 아들 이방원에게 맡겼습니다.

선죽교에서 이방원은 정몽주에게 다음과 같은 '하여가(何如歌)'를 읊으며 자신의 마음을 떠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는 '고려와 새 왕조가 얽히든 어떠하냐, 우리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회유의 노래였습니다.

이에 정몽주는 단호하게 '단심가(丹心歌)'로 답합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자신은 백 번 죽더라도 고려에 대한 충절을 꺾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단호한 태도에 더 이상 회유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부하인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피살했습니다. 이로써 고려의 명맥을 지키려던 마지막 기둥이 무너졌고, 조선 건국은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되었습니다.

  • 야사: 선죽교에 맺힌 정몽주의 핏자국: 정몽주가 피살된 선죽교에는 그의 피가 낭자하게 튀었고, 그 피 얼룩은 아무리 비바람이 불어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백성들은 정몽주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며 비석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선죽교에는 붉은색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는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상징적인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출처: 『동국여지승람』 등 야사 기록)

4. 한양 천도와 무학대사의 역할 (1394년)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의 위엄을 세우고 수도의 길지를 찾기 위해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했습니다. 이때 도읍지 선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무학대사입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스승으로, 풍수지리설에 밝아 한양의 지형을 살펴 도읍지를 정하는 데 자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 야사: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수도 논쟁: 한양 천도 과정에서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동향(東向)으로 궁궐을 배치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정도전은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남향(南向)으로 궁궐을 짓는 것이 풍수적으로나 실용적으로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정도전의 의견이 채택되어 백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남산(안산), 낙산(좌청룡), 인왕산(우백호)을 좌우로 두는 남향의 한양 도성이 건설되었습니다. 이때 무학대사가 "200년 후에는 이 나라에 큰 환난이 닥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는 야사가 전해지는데, 이는 조선 500년 역사 중 임진왜란(약 200년 후)과 병자호란 등 큰 국난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출처: 『택리지』, 『연려실기술』 등 야사 기록)

5. 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과 이방원의 피의 대결 (1398년)

조선 건국 이후 이성계는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이는 이성계의 총애가 컸던 것도 있지만, 정도전이 주도하는 재상 중심의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정도전은 이방원이 가진 강력한 왕권 지향적인 성격을 경계했고, 상대적으로 유약한 이방석을 세자로 세워 자신의 재상 중심 정치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자부하던 이방원은 이 결정에 크게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세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왕권의 절대성을 주장했고, 정도전의 재상 중심 정치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결국 1398년, 이방원은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등 재상파의 핵심 인물들과 이성계의 어린 아들들(이방석, 이방번)을 제거하는 피의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이 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부릅니다. 이 난으로 정도전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고, 이성계는 크게 상심하여 정권을 이방원에게 넘기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이로써 조선 건국기의 이상은 꺾이고, 강력한 왕권 중심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 비하인드: 정도전과 이방원의 '경국(經國)' 이념 충돌: 이 둘의 대결은 단순히 권력 다툼을 넘어선 이념 대결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왕은 하늘의 뜻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지만, 그 권한은 재상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재상 중심 정치를, 이방원은 '왕은 하늘과 백성을 연결하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왕권은 그 무엇으로도 제약받을 수 없다'는 왕권 중심 정치를 주장했습니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보았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군주권을 남용하여 폭정을 저지를 수 있는 위험한 인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들의 충돌은 조선 초기 정치 이념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출처: 『태종실록』)

이처럼 조선의 건국은 이성계의 무력, 정도전의 사상, 이방원의 결단이 복잡하게 얽혀 이루어진 결과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충절을 지키려던 정몽주의 비극적인 최후와 같은 많은 희생이 뒤따랐으며, 이는 훗날 조선 왕조의 정치와 이념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추천 도서 및 참고 문헌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권 개국 (태조실록)
  • 저자: 박시백
  • 출판사: 휴머니스트
  • 정도전: 조선을 디자인하다
  • 저자: 박영규
  • 출판사: 김영사
  • 태종 이방원: 왕이 되려는 자, 모든 것을 걸어라
  • 저자: 이덕일
  • 출판사: 다산초당
  • 고려사
  • 저자: (국가 편찬)
  • 출판사: (다양한 번역본 및 역주본 존재, 예: 동아대학교 출판부, 글항아리)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태종실록)
  • 저자: (국가 편찬)
  • 출판사: (국사편찬위원회 등 다양한 번역본 및 역주본 존재)

참고 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 우리역사넷 (contents.history.go.kr)
  • 위키백과 (ko.wikipedia.org)
  •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조실록』, 『태종실록』
  •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정도전 저술)
  • 『택리지』, 『연려실기술』 등 야사 기록이 포함된 고전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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