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드라마

드라마 "폭군의 셰프 8회", 조선 임금의 중국 사신 목례는 당황스럽다.

곰곰이생각 2025. 9. 14.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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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폭군의 셰프 8회", 조선 임금의 중국 사신 목례는 당황스럽다.

서론

- 이 리뷰는 필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가 있음을 밝힙니다. -

 

드라마 <폭군의 셰프> 8회 시작 장면에서 조선의 임금이 중국 사신에게 고개를 숙여 목례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임금이 사신과 목례를?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이는 시청자에게 강한 인상을 주지만, 실제 조선 시대의 외교 의례와 비교하면 명백한 고증 오류다. 조선은 명나라와 사대교린 관계를 유지했지만, 국왕이 사신에게 직접 목례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본 글에서는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관계, 의례 규범,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장면의 문제점을 분석해본다.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 관계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명나라와 사대(事大) 외교를 펼쳤다. 이는 명나라를 상국으로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는 대신, 국왕의 정통성을 책봉받는 체제였다. 그러나 ‘사대’는 단순한 굴종이 아니라,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의 자주성을 유지하는 외교 전략이었다. 명나라 역시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간섭하지 않았으며, 외교는 엄격한 의례와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외교 의례와 국왕의 위상

명나라 사신이 조선을 방문할 때, 국왕이 직접 영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의정부 고위 관원이나 예조 판서가 영접을 담당했다. 국왕이 직접 나오는 경우에도, 이는 국가적 중대사나 책봉 의식과 같은 특별한 상황에 한정되었다.

조선의 예법에서 목례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인사였다. 국왕은 황제에게만 절을 올릴 수 있었고, 그것도 직접 대면이 아닌 사절단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사신은 황제의 명을 전달하는 자이지, 황제 그 자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국왕이 사신에게 목례하는 것은 위계 질서상 불가능했다.


역사 기록 속 실제 사례

  1. 세종 12년(1430년): 명나라 사신 영접 시, 국왕은 근정전에서 앉은 채로 사신을 맞이했고, 사신이 절을 올린 뒤 가벼운 인사로 화답했다.
  2. 성종 9년(1478년): 책봉 교서 전달식에서도 국왕은 절 대신 좌정한 상태에서 예를 표했다.
  3. 인조 12년(1634년): 명나라 사신이 세자 책봉 칙서를 가져왔을 때, 인조는 교외에서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의 예를 행했으나, 이는 황제의 명을 직접 받드는 의식이었고, 사신 개인에게 절한 것이 아니었다.

드라마 속 장면의 문제점

  • 고증 오류: 국왕이 사신에게 목례하는 장면은 역사적 사실과 불일치.
  • 위계 질서 왜곡: 사신은 황제의 대리인이지만, 국왕보다 상위의 존재가 아니다.
  • 시청자 오해 가능성: 조선이 명나라에 과도하게 예속되었다는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음.

왜 이런 연출이 나왔을까?

드라마 제작진이 사대외교의 상징성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연출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역사 드라마에서 이러한 과장은 시청자에게 잘못된 역사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특히 <폭군의 셰프>처럼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모티프로 한 작품에서는 고증의 정확성이 더욱 중요하다.


결론

<폭군의 셰프> 8회에서 조선 임금이 중국 사신에게 목례하는 장면은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다. 실제 조선의 외교 의례에서는 국왕이 사신에게 절하거나 고개를 숙이는 일은 없었으며, 이는 국가 위신과 군주권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원칙이었다. 드라마 제작 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반영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더군다나 넷플릭스에서 전 세계가 보는 드라마인만큼 작은 실수가 나라의 위상까지 흔들리게 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는 폭군의 셰프를 재미있게 보고 있으나 아닌 건 아니지 않나 싶어서 쓰게 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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