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의 대마도 정벌
⚔️ 조선 세종의 대마도 정벌
1. 개요: 대마도 정벌이란?
- 일명: 기해동정(己亥東征) 또는 대마도 정벌, 공식 명칭은 대마도 토벌(對馬島討伐).
- 연도: 1419년(세종 1년)
- 배경: 대마도 해적(倭寇)의 지속적인 침략과 노략질에 대한 조선의 응징.
- 결과: 조선군의 일시적인 점령과 삼포개항 및 무역 협정의 기초 마련.
2. 관련된 주요 인물
인물 역할
세종대왕(이도) | 정벌의 명령자. 신중한 외교와 강력한 군사 대응 사이에서 전략적 결단. |
이종무(李從茂) | 대마도 정벌의 총사령관(수군절제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 |
유정현(柳廷顯) | 세종의 외교 자문관. 왜구와의 조약 체결을 설계. |
이신적(李愼迪) | 수군 부장. 이종무와 함께 작전에 참여. |
소 사다모리(宗貞盛) | 당시 대마도를 지배한 소씨(宗氏) 일족의 당주. 조선과의 화친 교섭에 나섬. |
허종(許琮) | 작전 후 외교 문서 작성에 참여. 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 수행. |
3. 사건의 전개
📌 3-1. 배경
14세기 말15세기 초, 일본 내 혼란기(남북조 시대무로마치 막부)로 인해 대마도 일대의 해적 집단이 급증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해안 마을을 약탈하고, 주민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거나, 재산을 약탈하였다. 세종 즉위 직전인 태종 말기에도 왜구의 침략은 빈번했고, 백성의 피해가 누적되었다.
태종은 무력보다는 외교적 차단책을 우선하였으나, 세종은 즉위 초부터 단호한 군사 조치를 준비하였다. 이때, 조선은 일본을 정벌하기보다, 해적의 본거지인 대마도만을 타격하기로 결정하였다.
📌 3-2. 세종의 결단과 작전 개시
- 1419년 음력 6월 19일, 세종은 **이종무를 수군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하고, 정규군 227척, 병력 약 17,000명을 이끌고 대마도로 출병시켰다.
- 이종무는 서해, 남해 일대의 병선을 모아 연합 수군을 편성, 연합 해군 사상 조선 최대 규모의 원정이 되었다.
- 작전 목표는 대마도 해적의 본거지를 급습하여 기반을 제거하고, 소씨 일족에게 해적 행위를 근절시키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 3-3. 전투의 전개
- 조선 수군은 대마도 남부에 상륙하여 왜구의 주 거점 20여 곳을 급습했다.
- 기록에 따르면 적 114명을 사살하고, 조선인 노예 약 130여 명을 구출하였다.
- 소 사다모리는 조선군의 기세에 압도되어 항복을 요청했고, 외교 교섭을 통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 조선군은 9일간 대마도에 주둔한 뒤 철수, 무력 시위로 목적을 달성한 후 더 깊은 전쟁으로 확산되는 것을 피했다.
📌 3-4. 결과와 후속 조치
- 정벌 이후, 소씨 일가는 조선의 군사력에 굴복하고, 조선과 무역을 전제로 한 화친 조약을 체결한다.
- 세종은 ‘계해약조(癸亥約條, 1443년)’를 통해 대마도에 제한적 무역권을 허용, 대신 왜구를 단속하고 조선과의 외교를 유지할 의무를 부과했다.
- 이후 대마도는 일본과 조선을 잇는 중개지로 발전하였다.
4. 인물 중심 서사와 이야기
⭐ 세종: 군주로서의 결단
세종은 과학, 문화의 왕이자 군사적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는 초기 신중하게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왜구의 반복된 침탈에 더 이상 인내하지 않고 적극적 무력 사용을 결정했다.
하지만 세종은 단순한 보복이 아닌 정밀한 외교 전략을 병행했다. 군사 작전 후, 대마도와 외교 채널을 복원하고 계해약조를 체결함으로써 무력과 외교의 조화를 실현한 사례로 평가된다.
⭐ 이종무: 실전 지휘관의 전설
이종무는 본래 함경도 출신 무관으로, 군사적 기량이 뛰어나 세종의 신임을 받아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조선 수군을 통솔하여, 상륙과 해상 전투 모두에서 빠르고 정확한 기동을 선보이며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일부 문신 그룹은 이종무의 과도한 화공 작전과 민가 파괴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세종은 이종무를 훈련도감 최고 지휘관으로 승진시키며 전공을 치하하였다.
⭐ 소 사다모리: 조선에 굴복한 대마도 지배자
소씨 가문은 원래 일본의 지방 영주였지만, 대마도의 왜구를 통제하기보다 방조하거나 협력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기습과 군사력 앞에 굴복한 소 사다모리는 “대마도는 조선의 신하국”임을 자처하며 복종 의사를 표명한다.
실제로 조선 실록에는 소씨 가문이 이후 수차례 조공을 바치고, 세종에게 감사의 서한을 보내온 기록이 등장한다.
5.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 (야사)
📌 5-1. "대마도는 본래 조선 땅" 주장?
**『세종실록지리지』 및 『동국여지승람』**에는 대마도가 본래 신라의 속령이었으며, 조선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과 신하들은 이 기록을 바탕으로, 대마도 정벌이 단순한 외국 침공이 아니라 “옛 땅을 회복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훗날 일본 막부가 조선과의 외교에서 **“대마도는 일본 영토”**임을 주장하며 긴장감을 지속했다.
→ ‘조선령설’은 조선 내에서는 일부 인정되었으나, 실질 통치권은 지속되지 않았고 결국 자주권을 주장하긴 어려웠음.
📌 5-2. 이종무의 고뇌: 민간인 피해 논란
실록에는 조선군이 전투 과정에서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에게 피해를 준 것에 대한 논란이 짧게 언급된다. 후일 사헌부에서 이종무의 군사 작전 방식에 대해 "화공(火攻)이 과도했다"며 문제를 제기했으나, 세종은 이를 크게 문책하지 않고 국방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야사에서는 이종무가 귀국 후 **"백성의 피를 흘리게 한 장수"라는 자책감에 사찰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하나, 정사에는 해당 내용 없음.
📌 5-3. 조선 백성 구출의 감동적 이야기
실록에는 대마도에서 조선인 포로 130여 명을 구출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중 일부는 수십 년간 납치되어 있었으며, 일부는 현지 여성과 결혼해 자식을 둔 사람도 있었다. 조선은 이들을 송환하고, 관노(官奴)가 되었던 경우 **특별히 면천(免賤)**을 시켜 자유민으로 복귀시켰다.
한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한 노인은 "죽기 전에 조선 땅을 밟아 꿈을 이뤘다"고 울었다고 한다.
→ 『세종실록』 권11, 계해년 기사 참조.
📚 추천도서 및 참고문헌
제목 저자 출판사
《세종과 대마도 정벌》 | 정재정 | 역사공간 |
《세종실록》 |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조선의 대외전쟁사》 | 이성무 | 청년사 |
《이종무 평전》 | 김성한 | 역사비평사 |
《대마도는 조선 땅인가》 | 오항녕 | 민음사 |
《조선왕조의 외교 전략》 | 박영규 | 웅진지식하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