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한양 천도에 관하여
🏯 조선의 한양 천도
1. 📜 한양 천도 개요
조선은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왕조다. 조선 건국 직후 수도는 임시로 개경(개성)을 유지하다가, 1394년 새로운 수도로 **한양(서울)**을 정식 천도한다. 한양 천도는 단순한 행정적 이전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 이념과 제도의 중심지를 세우는 국가 재건 프로젝트였다.
2. 👥 한양 천도 관련 핵심 인물
인물 역할
이성계(태조) | 조선 건국자이자 한양 천도의 최종 결정권자. |
정도전 | 천도 추진의 핵심 설계자. 풍수지리 및 정치 이상 실현을 위해 한양을 지목. |
무학대사 | 불교 승려로서 풍수지리에 능통하여 천도지 결정에 영향력 행사. |
하륜 |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정도전과 함께 천도를 이론적으로 지지. |
이방원(후일 태종) | 천도 초기에는 영향 미약하나, 정권 장악 이후 한양의 정비와 체제 완성에 기여. |
조준 | 개혁파 정치가로 세제 개혁과 수도 행정구역 설정에 관여. |
남은 | 군사 실무 책임자. 천도 후 도성 수비와 수도 방어 체제 구축에 참여. |
3. 🏞 천도의 이유와 과정
3-1. 배경
조선 건국 직후 수도 문제는 시급한 과제였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은 정치적 구심점 역할은 했으나, 귀족 중심의 구질서가 깊게 남아 있어 조선의 새 이념(성리학)을 구현하기에 부적합했다.
정도전은 조선의 중심 이념으로 성리학적 질서, 즉 군주 중심의 유교 정치 체제를 실현하고자 했고, 그에 걸맞는 새로운 수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3-2. 천도 후보지
정도전은 풍수지리와 정치적 중심성을 고려해 네 곳을 검토했다:
- 무악(현재 서울 서대문 일대)
- 한양(현재 서울 종로 중심)
- 지리산 북쪽 함양
- 영남권 지역
결국 여러 논의 끝에 한양이 낙점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산과 강의 지형이 풍수적으로 길지
-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전국 통치에 용이
- 한강 수로를 이용한 물자 수송 용이
- 국토를 남북으로 균형 있게 다스릴 수 있음
3-3. 한양의 도시 설계
한양은 단순한 행정 수도가 아니라, 조선의 이념과 철학이 구현된 이상 도시였다.
- 정도전은 유교 이념에 따라 도성의 구성(경복궁, 사대문, 종묘, 사직단)을 설계
- 경복궁은 북악산을 등지고 남향하여 왕권의 상징으로 건립
- 종묘와 사직단은 각각 조상의 제사와 국토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유교적 질서를 상징
정도전은 특히 『주례』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양을 "예의와 질서의 수도"로 재구성하려 했다.
4. 📚 인물별 서사
4-1. 이성계(태조) – 결단의 정치가
이성계는 당초 개경을 유지하려는 의향도 있었으나, 정도전의 설득과 불교·유교 지도층의 권고를 받아들여 천도 결정을 내린다. 그는 천도 이후 경복궁 착공과 도성 축조에 국가 자원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천도 이후 정치적 불안정과 왕자들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는 곧 상왕으로 물러나 정치를 이방과, 이방원 등에게 넘기게 된다.
4-2. 정도전 – 수도 이전의 설계자
정도전은 천도 당시 도시 공간을 유교 이념에 맞게 재배치하였고, 『조선경국전』과 같은 법전 초안을 통해 천도 이후의 행정 체계를 완성했다. 그는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라, 조선을 유교 국가로 재편하는 사상가이자 건축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개혁 성향은 결국 이방원과의 충돌로 이어졌고,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제거된다.
4-3. 무학대사 – 풍수의 조언자
무학은 이성계와 개인적 친분이 깊은 불교 승려로, 초기 조선의 풍수적 자문 역할을 맡았다. 한양에 대해 "왕기가 서릴 땅"이라 하여 강력히 추천하였고, 이는 천도 결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불교 세력이 약화되면서 이후 실각하게 되었으며, 정도전과는 종교적·이념적으로 대립했다.
4-4. 하륜 – 정치의 설계자
하륜은 유교 학자이자 행정가로, 정도전과 함께 천도 논의에 참여하였다. 그는 유교식 통치 체제 정비에 더 집중했으며, 후일 태종 즉위 후 재상으로서 한양의 행정 제도를 정비하였다.
5. 🕵️ 비하인드 스토리 및 야사
📌 5-1. 무악 천도설과 정도전의 반대
처음에는 이성계가 무악(서대문)으로 천도하길 원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무학대사가 강력히 주장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도전은 **‘산이 너무 낮아 도읍지로 부적절하다’**며 거부하고, 결국 현재의 한양으로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과 무학대사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고, 이후 무학이 정계에서 밀려난 원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 실록에 직접적인 갈등 기록은 없으나, 풍수에 대한 견해 차는 간접적으로 언급됨.
📌 5-2. 정도전의 유교 이상과 현실의 괴리
한양을 설계할 때 정도전은 도시 안에 시장(저자)를 배치하지 않으려 했다. 이는 유교적 이상에 따라 상업을 억제하고, 농업 중심 질서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후 실무 관료들은 **"백성은 살아야 하며, 물자 유통은 필요하다"**고 반박했고, 결과적으로 종로 일대에 시전이 설치되었다.
→ 『경국대전』 및 『태조실록』에 유통정책 관련 내용 일부 확인됨.
📌 5-3. 한양 도성 설계 도중의 미신적 믿음
한양 도성의 북쪽 백악산(북악산)을 기준으로 도성을 쌓을 때, 수차례 성벽이 무너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당시 공사 감독관들은 “이 땅에 도성이 서지 않으려 한다”며 동물의 피를 뿌리고, 제를 올리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이러한 미신적 행위는 정도전이 강하게 반대했으나, 백성들 사이에서는 “한양이 길지는 아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 해당 기록은 실록보다는 야사 및 민간전승에 더 많이 전해짐. 정사에는 일부 제사 관련 기록만 존재.
📌 5-4. 한양 천도 후 유배된 고려 유민들
한양 천도 이후, 개경 귀족과 고려 충신들은 반발하였다. 일부는 새 정권에 협력했지만, 일부는 “한양은 역성의 땅이다”라며 저항했고, 이에 따라 수십 명의 전 고려 관료들이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특히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불리던 정몽주의 죽음 이후, 그의 제자들이 한양 천도를 저주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 실록에서 정몽주의 죽음과 그 여파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나, 천도 저주 설은 야사 중심.
📚 참고문헌 및 추천 도서
제목 저자 출판사
《정도전 평전》 | 이덕일 | 역사의아침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 조선왕조실록 편찬관 | 한국고전번역원 |
《한양의 탄생》 | 김창석 | 사계절 |
《조선건국과 수도 이전》 | 김윤정 | 역사비평사 |
《조선도시계획의 뿌리》 | 박성진 | 푸른역사 |
《하륜과 태종의 정치》 | 이정철 | 글항아리 |
《풍수와 조선의 수도》 | 정영훈 | 생각정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