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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역사

강화도 외규장각과 의궤의 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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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외규장각과 의궤의 전모

강화도 보관의 이유와 외규장각 개요

조선은 왕실·국가 의례 기록과 중요한 서적을 분산 보관해 전란·화재에 대비했습니다. 정조는 1782년에 수도에서 떨어진 군사 요충지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해, 왕실 관련 서적과 의궤 등 핵심 기록을 안전하게 보존하도록 했습니다. 내규장각(한양)과 외규장각(강화도) 체제로 분산 배치해 유사시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국가적 방어 아카이브 전략이었습니다. 외규장각에는 왕이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와 여러 관서에 나누어 보관하는 분상용 의궤가 체계적으로 축적됐는데, 어람용은 고급 재료와 정교한 장정으로 제작된 최고본이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와 프랑스의 약탈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원정군은 강화도에 상륙해 외규장각을 최종 목표로 삼고 철수 직전 건물에 불을 지른 뒤 도서와 문서를 약탈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5,000여 권이 소실되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권이 약탈됐습니다. 그중 297권이 외규장각 의궤였으며, 나머지도 왕실 문서와 은궤 등 각종 기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외규장각을 노린 이유는 왕실 의식·통치의 ‘정본’이자 유일본이 다수인 의궤의 외교·정치적 활용 가치, 그리고 약탈품 전시에 의한 제국주의적 과시 효과가 있었기 때문으로 연구자들은 설명합니다.


프랑스 내 보존과 ‘발견’까지의 경위

약탈된 외규장각 의궤는 한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체계에서 비가시적 상태로 머물렀습니다. 20세기 후반까지 상당수가 중앙 분관의 폐지 창고 등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분류가 어수선했고, 중국 고문서와 혼재되는 등 정확한 정리 없이 방치되다시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전환점은 1970년대 후반—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사서 고(故) 박병선 박사가 자료를 추적·대조해 외규장각 의궤 존재를 밝혀내면서부터입니다. 그는 1979년경 의궤의 실재를 확인하고, 국내 소장 의궤와 서지 비교·해제를 통해 국제 학계에 가치를 알렸습니다. 이러한 학술적·현장적 작업으로 외규장각 의궤의 소재와 목록이 비로소 공론화되었습니다.


반환 협상과 단계별 귀환 과정

  • 1993년 9월: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방한 당시, 상징적 1권(‘수빈휘경원원소도감의궤’ 중 1책)이 먼저 돌아오며 “전량 반환”의 단초가 열렸습니다.
  • 2010년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 계기 한-프 정상 간 합의로, 의궤 일괄 귀환의 기본 틀이 마련됩니다. 다만 프랑스 국내법(국유 문화재 불양도 원칙) 때문에 “소유권 이전”이 아닌 “대여” 형식이 채택됩니다.
  • 2011년 4~5월: 1차 75권(4월 14일) 도착을 시작으로 4회에 걸친 운송 끝에 297권 전체가 한국에 도착.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공개하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합의문에는 “5년 단위 대여, 자동 갱신”이 핵심입니다. 그 결과 실질적으로는 한국 내에 계속 머물되, 법적 소유권은 프랑스에 남는 구조가 성립했습니다.


‘영구임대’의 실상과 비용 논점

  • 용어 정리: 국내에서 흔히 ‘영구임대’로 부르지만, 문서상은 “5년 대여, 자동 갱신”입니다. 영구 반출·영구 임대라는 표현은 정치·외교적 수사에 가깝고, 법적으로는 매 5년 갱신되는 대여 계약입니다.
  • 소유권과 활용: 소유권은 프랑스에 있고, 한국은 전시·연구·보존을 수행합니다. 대여 재반출(예: 해외 전시 대여) 등 2차 활용에는 프랑스 측 승인 등 제약이 따릅니다. 한국의 국가등록(국유 문화재)로도 등재할 수 없습니다.
  • 비용 문제: 대여료(‘렌탈비’)를 한국이 지불한다는 합의는 없습니다. 다만 2021년 갱신 과정에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제3자가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할 경우 사용료를 낼 것”이라는 취지의 조항을 제시해 논란이 일었고, 한국 측은 수용 불가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운송·포장 등 유물 호송에 관한 실비는 국제 관례에 따라 한국 측이 부담해 온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비하인드 스토리와 쟁점의 맥락

  • 박병선 박사의 집요한 추적: 그는 프랑스 내 비가시화된 한국 약탈문화재의 목록을 찾아내고, 외규장각 의궤의 서지적 가치를 국제적으로 알렸습니다. 박 박사의 학술 성과와 시민·학계의 여론 형성이 없었다면 2011년 일괄 귀환 합의는 요원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 ‘교환’ 요구와 딜레마: 1990년대 이후 프랑스는 직·간접적으로 “상호 대여·교류” 프레임을 제시해 왔고, 일각에선 ‘맞교환’ 여론이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의궤의 약탈성과 유일본성, 세계기록유산의 성격을 근거로 무상 귀환의 당위성을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 국제법과 국내법의 충돌: 프랑스는 ‘국보급 공공 컬렉션 불양도’ 원칙을 근거로 소유권 이전을 원천 봉쇄했고, 한국은 “5년 대여 자동 갱신”이라는 현실적 타협을 선택했습니다. 학계는 “최선은 아니어도 당대 가능했던 차선의 해법”으로 평가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소유권 환원을 위한 외교·법률 장치를 계속 모색해야 한다고 봅니다.
  • 전시와 연구의 확대: 2011년 귀환 직후와 10주년(2021~2022년) 즈음에 특별전이 열려 대중 접근성이 크게 개선됐습니다. 디지털화·주제별 해제가 진전되며 역사·미술·의식·물질문화 연구의 기반이 넓어졌습니다.

조선 의궤가 강화도 외규장각에 집중 보관된 것은 ‘분산·중복 보관’이라는 국가적 위험관리의 결과였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의 약탈은 그 체계를 정면으로 타격했지만, 20세기 후반 발견과 21세기 외교 협상을 거치며 ‘반환’의 물꼬를 텄습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한국에 있는, 그러나 법적으로는 프랑스 소유’라는 불완전한 귀환입니다. 이 불완전성을 메우는 일—정확한 기록, 투명한 공개, 학술과 시민사회의 지속적 관심—이 다음 단계의 정당한 ‘진짜 귀환’을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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